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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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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가이후 도시키 총리의 사임으로 인해 치러졌다. 미야자와 기이치, 미쓰즈카 히로시, 와타나베 미치오가 출마하여 경세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으며, 오자와 이치로의 면접을 거쳐 경세회는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했다. 1991년 10월 27일, 선거 결과 미야자와 기이치가 285표를 얻어 총재로 당선되었고, 와타나베 미치오는 120표를 획득했다. 이 선거는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1993년 자민당 분열과 정권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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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선거 개요
선거 이름199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깃발 이미지
선거 유형총재 선거
진행 여부아니오
이전 선거1989년 8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89년 8월
다음 선거1993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93년
선거 날짜1991년 10월 27일
선거 제도총재 공선 규정에 따른 총재 선거
투표 결과
후보 1미야자와 기이치
득표수 1285
후보 2와타나베 미치오
득표수 2120
후보 3미쓰즈카 히로시
득표수 387
총재 정보
선거 전 총재가이후 도시키
선거 후 총재미야자와 기이치

2. 배경

1991년 10월 4일,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중의원 해산을 추진하려 했으나 가네마루 신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가이후는 정치 개혁을 둘러싸고 자유민주당 집행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결국 가이후는 사임을 결정했다. 이를 가이후 끌어내리기라고 한다.

가이후의 사임 표명으로 총재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경세회(다케시타파) 회장 가네마루는 회장대행 오자와 이치로에게 총재 선거 출마를 권유했지만, 오자와는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가이후는 사임 발표 다음 날 총재 선거 불출마를 표명했다.

굉지회(미야자와파), 청화회(미쓰즈카파),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는 경세회가 독자 후보를 내면 연대하여 대항하기로 합의했으나, 오자와의 불출마로 경세회가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자 세 파벌은 협력에서 경쟁으로 전환했다. 각 파벌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미쓰즈카 히로시, 와타나베 미치오가 출마하여 경세회의 지지를 원했다.

오자와는 세 후보를 면접했는데, 이를 '오자와 면접'이라 불렀다.[3] 가네마루,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는 협의하여 경세회의 지지 후보를 선정했다. 처음에는 와타나베 지지로 기울었으나, 미야자와가 뛰어난 영어 실력을 선보여 여론의 지지를 얻자 경세회는 최종적으로 미야자와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10월 11일, 가네마루는 경세회 총회에서 미야자와 지지를 표명했으나, 파벌 내 일부 간부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경세회 소장파 의원들은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아 미야자와 지지가 확정되었다. 미야자와는 훗날 이때를 승리가 결정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는데, 이는 경세회의 지지가 총재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

3. 후보자

와타나베 미치오


1991년 총재 선거에는 굉지회(미야자와파)의 미야자와 기이치, 청화회(미쓰즈카파)의 미쓰즈카 히로시,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의 와타나베 미치오가 출마했다.

가이후 도시키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된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3명의 후보 정보는 다음과 같다.

후보자소속 파벌주요 경력
미야자와 기이치굉지회(미야자와파)중의원 의원(9선, 히로시마현 제3구)
대장대신(1986-1988)
총무회장(1984-1986)
미쓰즈카 히로시청화회(미쓰즈카파)중의원 의원(7선, 미야기현 제1구)
외무대신(1989)
정무조사회장(1989-1990)
와타나베 미치오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중의원 의원(10선, 도치기현 제1구)
통상산업대신(1985-1986)
정무조사회장(1987-1989)



경세회(다케시타파) 회장대행이었던 오자와 이치로는 회장 가네마루 신으로부터 총재 선거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고사했다. 오자와는 심장병으로 일본 의과 대학 부속 병원에서 한 달 넘게 요양하다 8월 10일에 퇴원한 상황이었다.[3]

3. 1. 오자와 면접

자유민주당 집행부와의 갈등으로 사임한 가이후 도시키의 후임을 결정하기 위한 총재 선거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다케시타파)는 유력 후보였던 오자와 이치로의 불출마로 인해 독자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굉지회(미야자와파)의 미야자와 기이치, 청화회(미쓰즈카파)의 미쓰즈카 히로시,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의 와타나베 미치오는 경세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3]

오자와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세 후보를 한 명씩 불러 면접을 진행했는데, 이를 당시 세간에서 '오자와 면접'이라 불렀다.[1] 이후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 세 명(가네타케쇼)이 협의하여 경세회의 지지 후보를 결정했다. 당초 가네마루는 미야자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산로쿠 전쟁에서 가네마루와 오자와가 미쓰즈카의 회장 승계에 개입한 적이 있어 와타나베 지지로 기울었다. 그러나 미야자와가 영어 실력을 발휘하여 좋은 인상을 주었고,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경세회는 최종적으로 미야자와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2]

4. 선거 과정

가이후 도시키 총리가 사임을 표명하면서 199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경세회(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은 회장대행 오자와 이치로에게 총재 선거 출마를 촉구했지만, 오자와는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한편 가이후는 총재 선거 불출마를 표명했다.

굉지회(미야자와파), 청화회(미쓰즈카파),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는 경세회가 독자적인 후보를 낼 경우 연대하여 대항하기로 합의했으나, 오자와의 불출마로 경세회가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자 협력에서 경쟁 관계로 전환했다. 각 파벌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미쓰즈카 히로시, 와타나베 미치오가 출마하여 경세회의 지지를 원했다.

오자와는 세 후보를 면접했는데, 이를 당시 세간에서 '오자와 면접'이라 불렀다.[3] 이후 가네마루,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가 협의하여 경세회의 지지 후보를 선정했다. 당초 가네마루는 미야자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산로쿠 전쟁의 경위도 있어 와타나베 지지로 기울었으나, 미야자와가 영어 실력을 발휘하여 여론의 지지를 얻자 경세회는 최종적으로 미야자와 지지로 합의했다.

10월 11일, 가네마루는 경세회 총회에서 미야자와 지지를 표명했지만, 파벌 내 일부 간부들은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하여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가네마루가 억지로 박수를 유도하면서 경세회의 미야자와 지지가 확정되었다. 미야자와는 훗날 이때를 승리가 결정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는데, 그만큼 경세회의 지지가 총재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4]

10월 27일 실시된 총재 선거에서 미야자와가 28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하지만 와타나베가 예상을 깨고 120표를 얻어 2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는 경세회의 표 일부가 와타나베에게 흘러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았다.

5. 결과

宮澤喜一|미야자와 기이치일본어가 1991년 10월 27일 총재 선거에서 총재로 선출되었다. 각 후보별 득표수는 다음과 같다.[2]

후보득표수국회의원 표당원 산정 표
미야자와 기이치285표207표78표
와타나베 미치오120표102표18표
미쓰즈카 히로시87표82표5표



제4 파벌이었던 와타나베 미치오는 예상을 뛰어넘는 120표를 획득하여 2위를 차지했다. 다케시타파의 표가 와타나베에게 흘러갔다는 소문이 있었다.[2]

6. 영향

이 선거를 통해 경세회(다케시타파) 내에서 오자와 이치로의 지배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1992년 10월 가네마루 신이 회장에서 물러나자 후계자를 놓고 오자와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하여 결국 경세회가 분열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4] 한편, 미야자와 기이치와 후계자 경쟁을 벌인 가토 로쿠가쓰 역시 미쓰즈카 히로시를 지지하지 않아 굉지회(미야자와파)에서 제명되어 굉지회 역시 분열했다. 가토는 이후 (가토 그룹)을 결성했다.

1993년 총선에서는 자민당의 분열과 야당 전락까지 초래했다. 와타나베 미치오미야자와 내각에서 부총리, 외무대신이 되었다.

참조

[1] 간행물 平成4年 竹下派分裂で小沢総理は幻になった 2018-02
[2] 뉴스 最大派閥、最後の決定権 91年(平成3)自民党総裁選 平成Politics30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8-31
[3] 간행물 平成4年 竹下派分裂で小沢総理は幻になった 2018-02
[4] 뉴스 最大派閥、最後の決定権 91年(平成3)自民党総裁選 平成Politics30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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